널리 알려졌듯이 헨리 8세는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였다. 둘의 결혼 문제는 재정·외교, 윤리·교회 교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문제의 기원은 헨리 8세의 형 아서 시절로 거슬러 간다.
캐서린은 스페인 왕가의 공주로, 당시 잉글랜드 왕세자인 아서와 결혼하였다. 둘 다 15세였다. 결혼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아서가 사망하였다. 캐서린은 남편 아서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해서 잉글랜드에 머물렀다. 스페인 왕가에서는 아서의 죽음으로 결혼 계약이 깨졌으니 그녀를 돌려보내고 이미 지급한 지참금을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헨리 7세, 즉 헨리 8세의 아버지는 지참금을 반환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캐서린을 잡아두고자 하였다. 스페인과의 동맹을 유지해 경쟁 상대인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외교적 목적도 있었다. 왕비 엘리자베스가 사망하자 헨리 7세는 본인이 캐서린과 결혼하겠다는 의도까지 내비쳤다. 그러나 스페인 왕실이 이를 거부하자, 1503년 6월 당시 11살이던 아들 헨리를 캐서린과 약혼시켰다.
헨리와 캐서린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큰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캐서린은 아서의 미망인으로 헨리의 형수였다. 둘은 교회법상 인척 관계에 해당해 혼인이 금지되었다. 교회법은 혼인을 통해 형성된 친족 간의 혼인을 금지했는데, 혼인을 새로운 친족관계를 형성하는 신성한 결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관련해서 『마태복음』 19장에 따르면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 신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결혼을 통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남편의 혈족은 아내의 인척이 된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한 몸’ 원리는 『레위기』에서 혼인을 금기하는 규정과 결합하여 인척 간 혼인을 금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레위기』 18장 16절은 “너는 네 형제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고 규정한다. 『레위기』 20장 21절은 “누구든지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니 … 그들이 자식이 없으리라”고 경고한다. 중세 교회법은 이 두 가지 성서적 가치를 결합하여 혼인으로 형성된 일정 범위 인척 간에는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서와 캐서린은 적법한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었으므로 헨리와 캐서린은 인척 관계로 ‘혼인장애’, 즉 교회법상 “혼인의 요건과 형식을 채우지 못해 유효한 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가 발생한다. 헨리와 캐서린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혼인장애’를 제거해야 했다. 다시 말해 교회법 금지 조항을 면제해 주는 교황의 특별 허가가 필요했다. 당시 교회법은 가까운 인척 간 결혼을 엄격히 금지하였지만 교황의 특별 허가가 있으면 예외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스페인과 잉글랜드는 교황에게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특별히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캐서린과 아서의 결혼은 형식적이었을 뿐 둘은 실제로 잠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이 온전히 성립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제시하였다. 캐서린은 당시에도 그랬고 이후로도, 아서는 병약했기 때문에 결혼생활 중 잠자리를 갖지 않았고 자신은 순결을 지켰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칙령을 통해 헨리와 캐서린 간 결혼을 허락하였다.
교황의 특별 허가에는 실리적 이해관계도 작용하였다. 스페인과 잉글랜드 왕가에게 둘의 결혼은 지참금 문제뿐 아니라 외교 동맹과 프랑스에 대한 공동 대응이 걸린 사안이었다. 두 왕실은 이 혼인이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질서와 왕실 간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호소하였다. 교황의 관점에서도 두 왕실의 지지를 확보하고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이점이 있었다.
2. 정략으로 시작한 결혼, 사랑으로 선택한 결혼 헨리 8세와 캐서린은 1509년 6월에 결혼하였다. 비록 둘의 결혼은 정략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지만 결혼생활은 화목하였다.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부부 관계였다. 물론 당시 여타 국왕들이 그러하듯 헨리 8세 역시 정부를 거느리긴 하였지만 말이다.
헨리 8세와 캐서린 간 결혼생활에 불화가 발생하는데,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왕과 왕비 사이에서 난 아들이 존재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캐서린은 여러 차례 임신하였으나 유산하였고 생존한 자녀는 딸 메리가 유일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526년 앤 불린이라는 매력적인 여인이 헨리 8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캐서린은 40대에 접어들어 추가 출산의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었고, 앤 불린은 20대 중반의 젊고 건강한 여인이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사랑에 빠졌다.
당시 국왕은 왕국 내 신민과 결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국왕의 결혼은 다른 왕국과의 갈등을 종식하거나 동맹을 맺는 정략적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앤 불린의 가문은 잉글랜드 내에서 최고위 출신도 아니었다. 왕국 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도 아니었다. 헨리 8세가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녀를 택했다는 의미이다.
헨리 8세가 사랑으로서 앤 불린을 선택하였지만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결혼은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교황에게서 캐서린과의 혼인이 무효임을 인정받아야 했다. 왕 개인의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잉글랜드 내부에서 혼인 무효화 요구를 지지해 줄 정치 기반을 확보해야 했다. 의회 구성원과 귀족, 성직자들의 협력이 필요하였다. 특히 왕비 교체는 왕위 계승과 직결하였기 때문에 앤 불린과의 결혼이 단순히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왕조의 미래를 위한 결정임을 설득해야 했다.
외교·종교적 장애물은 더욱 컸다. 캐서린은 스페인 왕가 출신 공주로, 그녀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교황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교황에게 헨리 8세의 혼인 무효화 요청은 교회법에 따른 판단을 넘어 국제 정치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교황이 헨리 8세 편을 들기에는 카를 5세의 영향력이 너무 막강하였다.
결국 헨리의 개인적 욕망은 교황권과 국왕권의 충돌, 잉글랜드와 스페인 간 외교적 대립으로 확장하였다. 앤 불린과의 결혼 계획은 사랑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외교·종교적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 결혼은 현실이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혼인 무효를 교황청이 아닌 잉글랜드 국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533년 잉글랜드에서 결정된 종교적·법적 판결을 교황청으로 상소하는 일을 금지하였다. 이어 잉글랜드 교회 법정에서 헨리 8세와 캐서린 간 혼인이 처음부터 유효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잉글랜드 내에서 내려진 판결을 교황청에 상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결정은 합법적으로 승인되었다. 마침내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결혼생활을 정리하였고 앤 불린과 혼인하였다.
1534년에는 수장령이 선포되면서 잉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하고 최고인 수장임을 공포하였다. 교황의 종교·사법적 권위는 잉글랜드에서 공식적으로 배제되었다. 결국 헨리 8세와 앤 불린 간 결혼은 사랑에서 시작하였지만 잉글랜드 내 종교개혁을 초래하였고, 국내 정치 재편과 국제 외교 관계의 긴장을 유발하였다.
3. 왕의 곁에 끝내 남은 것은 무엇이었나?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로 하는 절차를 7년여 추진했지만 막상 결혼생활은 3년 만에 파국으로 끝났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이 첫딸 엘리자베스를 출산한 뒤 아들을 낳지 못한 데서 오는 실망감이 컸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그녀의 언행에 피로감이 누적되었다.
결국 앤 불린은 간통, 반역,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되어 1536년 5월 19일 참수되었다. 다음 날인 5월 20일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와 약혼하였고, 5월 30일 결혼식을 올렸다(제인 시모어 사후 헨리 8세는 세 번 더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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