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은 시간을 능동적으로 통제·관리하기 어려웠다
중세 서유럽에서 개인은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웠다. 상업 경제가 우세하지 않던 농업 기반 사회에서 개인의 시간은 자연 주기를 따른다. 일출과 일몰로 일과가 시작되고 끝난다. 계절 변화와 절기 및 날씨 상황에 따라 들판에서 해야 할 일이 결정된다. 농사일은 개인 활동 못지않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협업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중세 시대에는 무거운 쟁기를 끌기 위해서 여러 명이 함께 일해야 했으며, 가축과 장비를 공유했다. 공유지에서 나오는 자원을 함께 활용했으며 공동으로 목축하였다. 또 장원 경제 체제에서 노동자(비자유민 농도, 반자유민, 자유민)는 영주의 시간 규율을 준수해야 했다. 노동자는 본인 임대 토지에서보다 영주 직영지에서 일하는 게 우선하였다. 도시민 역시 길드 구성원으로서 길드가 정한 시간 규율을 준수해야 했다. 길드 규칙은 작업 시간, 시장 개장 시간, 거래 가능 시간 등을 규정하였고 도시민은 공동체 규약으로서 이를 따랐다. 중세 시대 개인은 여러 여건상 시간을 능동적으로 통제·관리하기 어려웠다.
2. 중세 축일·휴일은 휴가가 아니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회답게 축일·휴일이 많았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연간 100-150일 정도로 추정된다. ‘신성한 날’을 뜻하는 휴일(holiday)과 신이나 성인을 기리는 축일(feast)은 종교·공동체적 시간 구조하에서 개인이 노동[일상]을 멈추고 안식하도록 강제하였다. ‘신성한 날’은 교회력이 규정한 성스러운 날로, 세속의 일을 멈추고 신에게 봉헌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였다. 현실은 다를 수 있었으나 원칙상, 노동이 금지되고 육체적 쾌락을 자제하며 참회와 고해성사를 하였다. 축일에는 신과 성인을 기리며 축제를 벌여 공동체 단위에서 구성원과 시간을 공유하였다. 결국 중세 축일·휴일은 개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통제하는 자유로운 시간이 아니었다. 종교·공동체적 질서 속에서 규율을 지키거나 공동체 구성원과 함께해야 하는 수동적 시간이었다.
3. 떠날 수 있어야 휴가가 된다
중세 맥락에서 오늘날 의미의 휴가는 사실상 현실화하기 어려웠다. 오늘날 휴가는 일상 공간을 벗어나 탈일상화한 공간으로 떠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물론 ‘방콕’하는 휴가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중세 말 사회·경제적 지배 구조에 균열이 발생하기 전, 또 중상류층 신분이 아닌 한 본인이 속한 공간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여행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순례나 상업활동 등 특수 목적하에서만, 그것도 영주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한 일이었다.여건이 허락하여 일상 공간을 떠나 이동·여행할 수 있어도 위험이 곳곳에 널렸다. 가도(way)망과 교량 등 교통 여건이 매우 열악했고, 외진 길목마다 도적 떼가 출몰하여 여행자를 위협하였다. 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숙식 비용을 제외하고도 위험을 피하고자 호위대를 고용해야 했고, 교량과 장원을 지날 때면 관할 영주에게 통행세를 지급해야 했다. 이런 현실 여건 때문에 “어디론가 떠나”는 행위는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되었다.
4. 현대 휴가 개념의 등장
위에 제시한 내용 때문에 중세 시대 그리고 그 이후로도 현대적 휴가 개념이 등장하기 어려웠다. 상황은 19세기 산업혁명기 이후부터 변화하였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처우 개선을 위해 노동운동이 전개되면서 노동자 권익이 증진되었고 노동자의 ‘쉴 권리’가 확산하였다. 개인이 시간을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관리·통제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개인이 일상[노동]과 분리된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 점차 조성되었다. 19세기 이래 사회가 급격히 산업화하고 또 이성·합리에 기반한 과학적 사유가 확장하면서 종교적 시간 체계는 약화·해체되었다. 종교·공동체적 시간 규율과 행동 양식을 대신하여 개인은 점차 세속화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화되었다. 교회력이 규정한, 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따라야 했던 축일·휴일 대신 개인을 위한 휴식·휴일이 증가하였다. 여기에 더해 철도를 비롯한 교통수단의 발전으로 과거에 비해 저비용으로 더 안전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이 시간을 주체적으로 관리·통제하며 일상에서 벗어나는 현대적 휴가 개념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다시 말해, ‘휴가는 떠나는 것’이라는 오늘날의 믿음은 인류가 태초부터 지녀온 본능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지난 150여 년 사이에 비로소 만들어진 역사적 발명품이다.
오늘날, 휴가의 그늘
지금의 휴가를 생각해 보자.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쉬고 즐기며 몸과 마음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휴가는 여전히 긍정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휴가가 ‘쉼’이 아니라 점차 ‘소비 이벤트’화 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는 문제들이 있다. 몇 가지만 보자. 휴가가 계층분화를 추동한다. 휴가가 상업화와 맞물려 고가의 호캉스 및 해외여행 등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간 문화자본이라는 측면에서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휴가는 또 다른 노동으로 변질된다. SNS 사용이 확산하면서 휴가·여행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화 되는 경향이 강화하였다. 휴가 속에서 행복과 즐거움, 여유를 누리기보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게, 또 보이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경향이 커졌다. 또 최근의 휴가 문화는 오버투어리즘과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발한다. 특정 시기 유명 휴가지에 관광객이 폭주하면서 교통 체증, 환경 오염, 쓰레기 방치, 현지민 불편 등 여러 문제가 심화한다. 관광지 개발로 임대료가 치솟아 현주민이 생활 터전에서 밀려나고, 지역색 짙은 문화 대신 대형화·자본화·획일화한 상업 시설이 들어선다. 무엇보다 휴가 동안 여유롭게 쉬고 즐기면서 재충전하여, 그 힘으로 또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지 의문이다. 휴가가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의 시간’이라기 보다 심적·물질적으로 구조화된 ‘소비의 시간’으로 변화한 것은 아닐까. 누구를 위한 휴가인지 의심스러운 지점이다.
부작용을 낳고 있는 지금의 휴가 방식 대신 어떤 게 가능한가. 위에 언급한 중세의 시간 질서 맥락에서 대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중세 축일·휴일에 사람들이 물질적·세속적 쾌락을 삼가며 공동체적 가치를 중심에 두었듯이, 소비주의와 상업적 물질주의에서 잠시 자유로워지고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어떠한가. 그럼으로써 ‘소비의 시간’을 보내도록 강제되는 것이 아닌 진정 시간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보내는 그런 휴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