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나만의 질문을 켜는 뉴스레터 Editor's Note
휴가를 떠나면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공간을 만난다. 낯선 거리와 광장, 오래된 건물과 미술관을 걷고, 때로는 이름난 건축물을 일부러 찾아간다. 대부분은 사진으로 남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공간은 사진보다 몸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건물을 이해하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게 하고,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압도되는 순간이 있다.
지난 5월, 건축가 이정훈 소장은 휴가로 뉴욕을 찾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보고, 시그램 빌딩의 광장을 걷고, 구겐하임 미술관과 루즈벨트 아일랜드를 지나며 뉴욕의 건축을 몸으로 경험했다. 그 여행에서 그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건물의 유명세도, 높이도, 새로운 형태도 아니었다.
왜 어떤 공간 앞에서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가.
이번 OFF LETTER는 8월 휴가편으로, 건축가 이정훈 소장의 뉴욕 방문기에서 시작해 몸이 반응하게 만드는 공간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따라가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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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전율하게 만드는 공간에는 무엇이 있는가?
건축에서 느끼는 '무게'는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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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전율하게 만드는 공간에는 무엇이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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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뉴욕, 2026. 촬영: 이정훈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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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객석이 어둠 속에 잠겼다. 무대 위에서는 타티아나가 편지를 쓰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에브게니 오네긴』, 1막의 편지 장면. 소프라노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의 목소리가 처음에는 가늘고 조심스럽게 시작되다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순간, 3,800석의 거대한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그 소리가 트래버틴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고, 샤갈의 벽화 앞에서 흩어지다, 천장 높이 떠올라 다시 내려와 피부에 닿았다.
이 공간의 뒤편에는 웅장한 자본의 역사가 흐른다. 1883년 뉴욕 신흥 부유층의 돈으로 처음 세워진 이래, 적자와 경영진 교체, 대공황, 철거 위기라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견디며 1966년 지금의 링컨센터 자리에 들어섰다. 건축가 월리스 해리슨(Wallace Harrison)은 이 사원 같은 건물을 올리기 위해 무려 40번의 수정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창단 이래 143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 리투아니아 출신 소프라노가 러시아 시인이 쓴 소녀의 사랑 편지를 노래하고 있다.
공연이 끝나고 광장으로 나왔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건물을 시각적으로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무언가를 온전히 감지하고 있었다.
건축가로 살면서 오래 품어온 질문이 있다. 왜 어떤 건물 앞에서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가. 눈으로 분석하고 언어로 정리하기 전에, 피부와 발바닥이 먼저 그 공간의 밀도를 읽어낸다. 해리슨이 남긴 다섯 개의 거대한 아치와 수직의 트래버틴 핀들은 구조적으로는 ‘거짓 기둥’이다. 내부의 실제 하중은 콘크리트 돔 구조가 감당하고 있을 뿐, 바깥의 석재 핀들은 아무런 무게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짜 기둥들이 빚어내는 수직의 리듬은 광장에 단단한 밀도를 더한다.
몸은 그것이 구조적 거짓임을 알면서도, 공간이 건네는 정직한 리듬으로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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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축은 원래 몸에 새겨지는 감각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38년에 완공되었다. 그 앞에 선 사람은 인식 이전에 몸으로 먼저 완성을 느낀다. 파르테논의 기둥은 완벽한 수직이 아니라 안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고, 수평으로 보이는 바닥도 실제로는 중앙이 미세하게 볼록하다. 완벽한 수직·수평은 인간의 눈에 오히려 처지고 휘어 보이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은 인간의 시각적 착시를 교정하는 장치를 돌에 새겼다.
그 돌의 기억은 로마의 판테온을 거쳐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유럽 도시들의 광장으로 이어졌다. 이 교육은 교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시를 걸으면서, 광장에 앉으면서, 성당의 그늘 아래 서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새겨졌다. 유럽의 건축가는 비례를 머리로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이미 축적된 비례의 감각을 꺼내는 사람들이었다.
20세기 중반, 그 감각을 체화한 '몸'들이 대서양을 건넜다.
2. 자본의 그리드 위에 유럽의 문법이 이식되다 1943년 아인 랜드의 소설 『파운틴헤드』 속 건축가 하워드 로크는 설계가 훼손되자 완공된 건물을 직접 폭파한다. 창조자는 자신의 확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뉴욕에는 자신의 건축적 확신을 현실에서 밀어붙이는 건축가들이 있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와 루이스 칸(Louis Kahn) 같은 이들이다. 나치와 전쟁을 피해 유럽에서 건너온 이들은 유럽의 비례가 몸에 새겨진 채로,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 빠른 자본주의 도시에 도착했다. 본래 '많은 언덕의 섬'이라는 뜻의 '마나하타(Mannahatta)'라 불리며 아름다운 기복(Undulation)을 자랑하던 맨해튼은, 1811년 '위원의 계획'에 의해 토지 매매용 격자 그리드로 잔인하게 밀려 나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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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램 빌딩, 미스 반 데어 로에, 뉴욕, 1958. 촬영: 이정훈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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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탐욕스러운 그리드 위에서 미스는 시그램 빌딩을 설계하며 최대 용적을 포기하고 파크 애비뉴에서 90피트를 후퇴시켰다. 뉴욕 부동산 논리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자발적 손실이었지만, 그 거룩한 후퇴가 맨해튼 한복판에 숨통 같은 광장을 만들었다. 시그램 창업주의 딸 필리스 램버트가 "이 건물은 뉴욕 시민과 전 세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며 직접 미스를 불러들이고 자본의 방패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파사드의 브론즈 I빔은 구조적으로 불필요하여 비평가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미스는 고딕 성당의 수직성을 현대 산업 재료로 번역한 '시각적 진실'이라 받아쳤다. 건물이 물러섬으로써 오히려 공간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 비움이 채움보다 강하다는 유럽의 문법이 파크 애비뉴에 성공적으로 이식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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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프리덤스 파크, 루이스 칸, 뉴욕, 2012. 촬영: 이정훈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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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칸의 이야기는 더 애달프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설계한 '포 프리덤스 파크'는 1974년 그가 귀국길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 화장실에서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둔 후, 자금 문제와 도시의 무관심 속에 38년을 떠돌다 2012년에야 완공되었다. 맨해튼 UN 본부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삼각형 대지 끝에서 강물과 하늘을 향해 거대하게 열리는 '침묵의 방(The Room)'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그 유예의 시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건축적 저항의 역사다.
소설 속 로크는 폭파로 답했지만, 현실의 건축가들은 다르게 답했다. 수없이 수정을 견뎠고, 자본의 냉대 속에서 기다렸고, 끝내 자신이 죽고 나서야 공간을 세상에 남겼다.
3. 몸으로 받아들이는 경험, 그리고 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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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겐하임 미술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뉴욕, 1959. 촬영: 이정훈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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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겐하임 미술관의 외관은 철저히 닫혀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중앙의 거대한 원형 보이드가 하늘을 향해 단번에 열린다. 달팽이관 같은 나선형 램프를 따라 오르는 동안 압박과 해방, 수축과 팽창의 리듬이 반복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단순히 동선을 짠 것이 아니라 관람자의 몸이 느끼는 '공간의 호흡'을 설계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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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아일랜드에서 바라본 맨해튼, 뉴욕, 2026. 촬영: 이정훈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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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아일랜드 끝에서 맨해튼을 바라보면, 이스트강 건너로 높이와 너비 비율이 15대 1에 달하는 초슬렌더 타워(Super-slender Towers)들이 보인다. 현대 건축 공학의 극한을 보여주지만, 이상하게도 그 앞에서 내 몸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눈은 자극받을지언정 피부와 심장은 조용하다.
그곳에서 결정적으로 사라진 것은 바로 ‘무게’다. 재료의 진정성 있는 무게, 인간의 척도에서 비롯된 비율의 무게, 그리고 건축가의 숭고한 확신이 만들어내는 무게. 이 거장들이 뉴욕 땅에 심으려 했던 것은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라, 파르테논에서 시작되어 유럽의 광장들에서 몸으로 체득한 오랜 믿음 — 공간이 인간에게 영혼의 말을 걸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건물은 결코 시각적인 형태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그 공간 앞에 선 한 인간의 몸이 온전한 전율을 느꼈을 때, 건물은 비로소 영원한 ‘건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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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눈보다 몸으로 먼저 경험된다”는 관점에서 시장을 다시 관찰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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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OFF-002. 10 AUG 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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