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내세를 상상하고, 의식을 만들고, 기억을 남길까요? Editor's Note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것을 잊은 채 살아갑니다. 오늘 만난 사람을 내일도 만날 것이라 생각하고, 지금의 관계도 계속될 것처럼 하루를 보냅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문제입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죽음을 이야기해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앞에서 수많은 질문을 꺼냅니다.
이번 OFF LETTER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바람깃 원장님과 함께, 죽음을 마주한 인간이 오래도록 품어온 질문을 따라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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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할까요?
죽음 앞에서 내세를 상상하고, 의식을 만들고, 기억을 남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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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에도, 우리는 그 너머를 상상합니다. OFF LET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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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좀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앞에 놓입니다. 어제까지 함께 있던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까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죽음은 분명 하나의 끝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끝에서 생각을 멈추지 못합니다. 떠난 사람은 어디로 갔을지,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지, 남겨진 우리는 이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합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오래 고민하고, 때로는 그곳에 우리가 바라는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어쩌면 죽음은 끝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남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왜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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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ie, to sleep, maybe to dream...”
‘죽음’ 하면 저는 뉴트롤스의 노래 ‘아다지오’의 후렴구가 생각납니다. 서정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저 구절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시작되는 독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요. 거기서 햄릿은 아버지의 복수를 못한 채 치욕적으로 사느니, ‘죽는다는 건 잠드는 것’일 뿐이라며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암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지만 ‘잠들면 어쩌면 꿈을 꾸겠지. 그게 문제야! 삶의 굴레를 벗어나 죽음의 잠 동안 꾸게 될 그 꿈이 도대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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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를 알 수 없다는 불안 앞에서 햄릿은 삶과 죽음 사이를 망설인다,
묘지의 햄릿과 호레이쇼, 외젠 들라크루아 1839, 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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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햄릿’이 지금까지 수없이 읽히는 동안, 여전히 인간은 햄릿이 불안해했던 그 ‘죽음 이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렇기에 죽음 앞에서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에 여전히 공감할 수 있나 봅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그런 불가지성의 두려움이자, 또한 깊은 상실과 고통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진료실을 찾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과정 동안 어려움을 겪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하니 보내는 일상 중 갑자기 그 부재를 깨닫는 매 순간, 다시 무너지는 마음...... 때때로 상실의 허무는 삶의 의미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어, 자신의 죽음까지 바라게 될 정도니까요. 버틸 수 없어질 때, 종교나 믿음이 없던 사람들조차 무언가 기댈 것을 필사적으로 찾습니다. 죽은 이들은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 고통과 근심인 삶에서 해방되어 어쩌면 이젠 편안할 거라는 말, 지금 느끼는 이 슬픔과 고통도 사랑했던 증거이고 행복했던 기억들로 남은 삶을 견딜 수 있다는 말들이 전하는 생각들로 위로받으며 다시 일상과 삶으로 복귀하려 애를 씁니다.
죽음은 이다지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마도 사는 동안에는 결코 온전히 알고 경험될 수 없는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음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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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존재가 사라진 뒤에도 애도와 관계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늙은 양치기의 가장 슬픈 조문객, 에드윈 랜드시어 1837,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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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선 오랜 세월을 같이 했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잘라준다고 합니다. 윤회 사상의 영향으로 사랑했던 개가 다음 생에 환생할 때는 꼬리가 없는 존재,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바람이지요. 죽은 개의 입에는 버터 한조각을 물려주면서 부유한 집에 태어나길 기원하고, 저승에서 헤맬 때 배가 고프지 않게 약간의 쌀도 같이 묻어줍니다. 소박하지만, 함께 의지하며 삶을 같이 했던 존재에게 유목인들의 삶에서 상상가능한 최선의 것을 주고 싶은 절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이란 것을 소화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장례와 같은 의식들을, 내세를 상상하는 종교와 삶의 허무를 견딜 철학을, 죽음을 넘어 그 사랑을 기억하고자 하는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 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반드시, 갑자기 들이닥칠 죽음 앞에 삶은 너무나 연약하고 부질없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세상은 이렇게나 불합리하고, 그 속의 삶은 그렇게나 부조리할 뿐이어서, 삶과 죽음이란 한낱 구별되지도 않는 앞뒷면을 가진 한 장의 카드처럼 흐릿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령 삶이 그런 것이라 해도 그 무의미에 압도되지 않고 삶을 카드의 앞면으로 두고 무언가를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길일 거라 믿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사는 법을 고민하고 알아가는 존재니까요.
언젠가 햄릿처럼 죽음의 꿈은 어떤 내용일지 고민하는 이를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사랑했던 것들의 꿈을 꾸고 있을 거라고요...... 잠든 내내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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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은 그 관계를 완전히 끝내지 않습니다. 물건을 남기고, 장소를 찾고,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 그 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갑니다.
미국의 Parting Stone은 유골을 돌로 만들어 나누어 간직하게 하고, Better Place Forests는 숲의 나무 아래에서 고인을 기억하게 합니다. Eterneva는 유골이나 머리카락의 탄소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사랑했던 존재를 간직할 수 있게 합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끝난 관계를 그냥 사라진 것으로 두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 사람들은 ‘끝’을 어떻게 다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까요? 죽음뿐 아니라 이별, 졸업, 퇴직처럼 삶에는 수많은 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까요?
2. 반복되는 행동은 어떻게 하나의 리추얼이 될까요? 간직하고, 찾아가고, 반복해서 사용하는 행동은 평범한 물건에도 특별한 의미를 더합니다. 소비자는 우리 제품을 어떤 방식으로 반복해서 사용하며 자신만의 리추얼을 만들고 있을까요?
3. 우리 브랜드가 주목해야 할 ‘끝의 순간’은 무엇일까요? 이별, 졸업, 퇴직처럼 사람들은 삶의 전환점에서 무언가를 남기고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아직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그런 순간은 무엇이며, 우리 브랜드는 그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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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OFF-009. 28 SEP 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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