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길까? Editor's Note
당신에게는 삶과 죽음을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이 있나요?
묘지가 아니어도 됩니다. 교회나 절이 아니어도 됩니다. 걷다가 문득 멈추게 되는 곳,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되는 곳, 사라진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 곳, 혹은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는 곳. 우리에게는 그런 공간이 하나쯤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조호건축의 이정훈 소장에게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카를로 스카르파의 브리온 베가 가족묘가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그곳에서, 오히려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 또렷하게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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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정말 삶의 반대편에 있을까?
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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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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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Paris)에서 유학하던 시절, 내가 살던 조그마한 스튜디오를 잠시 빌려주고 받은 돈으로 유레일패스(Eurail Pass)를 끊었다. 먹고 자는 돈을 어떻게든 아껴서라도 건축을 보러 가는 일은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한 도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건축을 보기 위해 며칠씩 움직였다. 나에게 지도 위의 도시들은 관광지가 아니라 건축가들의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니스Venice는 내게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의 도시였다. 그러나 건축을 공부하던 내 눈에는 그 오래된 도시의 틈에 스카르파가 남겨놓은 작은 흔적들이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오래된 것을 지우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끼워 넣는 방법, 돌과 금속과 물이 서로 만나는 방식, 몇 센티미터의 단차로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디테일. 그의 건축은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시간의 켜 사이에 또 다른 시간을 가만히 스며들게 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베로나Verona의 카스텔베키오 뮤지엄(Castelvecchio Museum)도 걸작이었지만, 결국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베니스에서 한참 떨어진 작은 마을 산 비토 달티볼레(San Vito d'Altivole). 그곳에 브리온 베가 가족묘(Brion-Vega Cemetery) 가 있었다. 카를로 스카르파 후기 건축의 정점이자, 죽음이라는 가장 오래된 주제를 현대건축의 언어로 다시 해석한 장소였다.
산 비토(San Vito)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작은 동네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루카Luca라는 주민의 집에서 방 하나를 얻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해도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세계의 건축가들이 보기 위해 찾아오는 작품이 자기 동네 공동묘지 한쪽에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특별한 일이 아닌 듯했다.
그 순간 묘한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한 번 보기 위해 먼 나라에서 찾아오는 걸작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일 지나치는 동네 묘지일 수 있다. 위대한 건축도 결국 어느 사람의 일상 속에서는 평범한 배경이 된다. 어쩌면 죽음도 그와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죽음을 거대한 사건처럼 생각하지만, 공동묘지 옆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은 삶의 풍경 한쪽에 늘 놓여 있는 익숙한 존재일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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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온 베가 가족묘 입구, 카를로 스카르파, 1978, 사진 FAI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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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루카의 집을 나섰다. 길 양쪽으로 뾰족하게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아침 햇빛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걷고 있는 나보다 그림자가 먼저 길을 따라 움직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의 기억에서 건축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그림자다. 살아 있는 몸보다 먼저 움직이는 검은 형상. 나는 그 그림자를 따라 공동묘지로 걸어갔다.
브리온 베가 가족묘는 기존 공동묘지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인 프로필래움(Propylaeum)을 지나자 두 개의 원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하나의 원과 또 하나의 원. 완전히 합쳐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은 두 개의 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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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온 베가 가족묘의 교차하는 두 원, 카를로 스카르파, 1978, 사진 Filippo Poli CC BY-SA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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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을 생각했다. 삶과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나뉘는 것일까. 살아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이미 수많은 것을 잃고,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억 안에서 오랫동안 살아간다. 두 개의 원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교차하는 작은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겹침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만 프로필래움은 단순한 출입구라기보다 어떤 경계를 넘어가는 문턱처럼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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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과 죽음이 겹치는 공간, 브리온 베가 가족묘
브리온 베가 가족묘의 안쪽에는 입구와는 또 다른 장면들이 이어진다. 조금 더 들어가면 주세페 브리온(Giuseppe Brion)과 그의 아내 오노리나(Onorina Brion)의 석관이 놓인 아르코솔리움(Arcosolium)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의 석관은 무심하게 평행으로 놓여 있지 않다. 미묘하게 기울어져 서로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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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온 부부의 석관과 아르코솔리움, 카를로 스카르파, 1978, 사진 Wittylama CC BY-SA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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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에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게 하려는 듯하다. 그 위로 열린 사각의 틈에서 빛이 떨어진다. 스카르파에게 빛은 공간을 밝히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러내기 위한 또 하나의 재료처럼 보였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상태, 존재와 부재 사이에 머무는 빛.
그리고 이 모든 공간을 물이 연결한다.
브리온 베가묘에서 물은 조경을 위한 장식이 아니다. 물은 건축과 건축 사이를 연결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거리를 만들며, 콘크리트의 무게를 다시 보이게 한다. 무겁고 움직이지 않는 콘크리트 옆에서 물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콘크리트가 영속성을 말한다면 물은 시간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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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온 베가 가족묘, 카를로 스카르파, 1978, 사진 Luca Chiaudano, Vanity Fair Ital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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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 위에 작은 파빌리온(Pavilion)이 떠 있다. 가까이 있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장소다. 물이 산 자와 그 공간 사이를 가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쉽게 건너갈 수 없는 곳. 죽음을 위한 장소 전체가 물로 이어져 있는데, 정작 그 물 위의 공간은 삶의 일상적 동선에서 한 발 떨어져 있다.
그날 나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시간의 감각도, 허기의 감각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도취해 있었다. 물을 따라가고, 벽 뒤를 돌아가고, 좁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고, 콘크리트의 표면에 손을 대보고, 다시 정원으로 나오기를 반복했다. 건축을 보러 갔지만 어느 순간 건축을 보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어졌다. 공기의 냄새가 기억난다. 풀과 물과 젖은 콘크리트가 섞인 냄새. 사이프러스 사이를 지나오던 바람. 수면을 흔들던 작은 파문. 콘크리트의 모서리를 스치며 들어오던 빛. 그 모든 것이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울고 있었다.
왜 울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슬퍼서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멋진 형태를 보았을 때 느끼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너무 거대한 두 세계가 한 장소 안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초월적인 공간에서 스카르파와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죽은 사람의 공간인데 물은 흐르고 있었다. 묘지인데 새가 울고 있었다. 콘크리트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위의 빛은 계속 변했다. 사람은 죽었지만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그 순간 죽음이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개는 이미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그제야 입구의 두 개의 교차하는 원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나는 삶이고 하나는 죽음이다. 두 원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아주 작은 부분에서 겹친다. 삶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죽음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장소. 브리온 베가 가족묘 전체가 바로 그 겹쳐진 부분에 만들어진 건축이었다.
2. 《듄》에서 다시 만난 브리온 베가
수십 년이 지나 영화 《듄: 파트 2(Dune: Part Two)》에서 나는 이 공간을 다시 만났다. 브리온 묘의 정원과 파빌리온은 머나먼 미래의 황제의 행성 카이타인(Kaitain)의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특히 물 위의 파빌리온이 영화 속 의례적 장면의 배경이 되는 순간, 이 공간이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듄》의 세계에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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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파트 2의 카이타인 장면, 드니 빌뇌브, 2024, Warner Bros.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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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의 공간에는 여러 시대와 문명의 질서가 혼재한다. 미래이면서 고대이고, 종교적이면서 기술적이며, 동양적이면서 서양적이다. 어느 하나의 시간이나 문화로 규정되지 않는다. 정의되지 않은 시간 속에 놓인 공간이다.
스카르파의 브리온 베가도 그렇다. 일본 정원의 흔적이 있는 듯하다가 베네치아(Venezia)의 물이 나타나고, 비잔틴(Byzantine)적인 색채와 서구 모더니즘(Modernism)의 기하학이 교차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미래와 과거, 동양과 서양, 삶과 죽음, 기하학과 파편, 물과 콘크리트. 스카르파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공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두 세계는 서로를 알아본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스카르파의 장소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기보다, 그 장소 안에 이미 잠재해 있던 시간을 끌어낸 것처럼 보였다.
《듄》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파트리스 베르메트(Patrice Vermette)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바람과 냄새, 자연과 건축에 압도되어 울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오래전 산 비토의 아침으로 돌아갔다. 그가 왜 울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그 지독하게 아름다운 공간이 만들어내는 황홀경. 그리고 내가 아직 살아서 그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
이보다 삶과 죽음이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
3. 삶과 죽음 사이에 남은 거리
젊었던 나는 죽음을 알지 못했다. 죽음은 아직 너무 멀리 있었고, 브리온 베가 가족묘 역시 훌륭한 건축을 보기 위해 찾아간 여행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공간의 기억이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사건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계속 무언가를 잃는다. 사람을 잃고, 시간을 잃고, 젊음을 잃고, 기억을 잃는다. 그러면서 죽음은 조금씩 삶 안으로 들어온다. 어쩌면 죽음은, 그날 아침 나보다 먼저 길을 걷던 그 그림자처럼,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좋은 묘지는 죽음을 숨기는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스카르파는 죽음을 어둡고 폐쇄된 곳에 가두지 않았다. 그 옆에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고, 하늘을 열어두었다. 죽은 사람 곁으로 빛이 들어오고 계절이 지나간다. 죽은 자는 멈추어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계속 살아간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한 장소 안에 함께 있다. 브리온 베가는 죽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죽음을 극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죽음 옆에 물을 흐르게 하고, 빛을 들이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죽은 자는 머물고 산 자는 지나간다. 스카르파 자신도 결국 자신의 뜻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 평생 물질과 시간의 경계를 다루었던 건축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장소가 자신이 만든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는 사실은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물 위의 파빌리온처럼 그 둘 사이에는 언제나 건널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남아 있다.
그 거리가 어쩌면 삶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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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관점에서
공간을 다시 관찰해 보세요.
우리는 공간을 만들 때 그곳에서 사람이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지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장례식장과 화장터, 봉안당처럼 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에서는 기능과 효율이 경험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을까요? 브리온 베가 가족묘는 죽음을 숨기기보다 물과 빛, 나무와 시간 속에 함께 놓았습니다.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다른 생각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이 공간은 죽은 사람을 어떻게 모실 것인가뿐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까지 생각하고 있는가?
장례식장, 화장터, 봉안당은 본래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가장 큰 상실을 경험하는 순간에 머무는 사람의 감정과 기억까지 공간이 고려할 수는 없을까요?
- 기능이 분명한 공간일수록 사람의 경험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병원, 요양시설, 학교, 공공시설처럼 목적이 명확한 공간에서는 효율과 동선이 우선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고 기억하는지도 함께 설계되고 있을까요?
- 우리 공간은 떠난 뒤에도 어떤 생각을 남기는가?
편리하고 보기 좋은 공간을 넘어, 그곳에서의 경험이 사람에게 새로운 생각이나 감정을 남기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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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OFF-008. 21 SEP 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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